백두대간 사람들 35 추풍령- 추풍령의좌절과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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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안강 댓글 0건 조회 204,100회 작성일 18-06-07 15:15본문
‘구름도 자고 넘는 바람도 쉬어 넘는’ 고개는 흘러간 유행가 가사에서나 있었다. 추풍령은 아스팔트 길 한쪽에 ‘秋風嶺’ 세 글자와 노래말을 새긴 돌 이정표가 아니라면 누구도 고개라고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느릿하게 누워 있었다. 옛 사람들은 고개를 험하기와 위치를 따져 ‘령, 재, 치, 티’로 구분해 이름을 붙여놓았다. 구름과 머리를 맞대는 고개라야 가질 수 있는 ‘령’이란 돌림자를 오르막과 내리막을 제대로 구별하기도 어려운 추풍령에 달아준 이유는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을까?
내력을 알고 싶어 찾아간 면사무소는 마치 동네 사랑방 같았다. “김천 직지사에 머물던 사명대사가 고개를 지나는데 바람이 마치 가을바람처럼 선선하게 불었다나봐요. 그래서 ‘가을바람’ 추풍령이라고 불렀다고 하는 말이 전해집니다.” 정병선(66·추풍령면 개발자문위원회) 위원장이 들려준 이름의 내력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 2만명을 막아내다 금산으로 우회한 적의 기습으로 전사한 장지현 의병장에 관한 이야기를 거들던 손영달(51) 영동군 의원이 화제를 바꾼다. “이곳이 전국에서 고속도로, 철도, 국도가 가장 가깝게 있는 곳이오. 아주 요충이지.” 추풍령면의 명물이라는 캠벨포도를 내온 추풍면 이한욱 면장까지 자리에 함께 하면서 탁상 위에는 구한말 역사가 펼쳐진다.
조선시대 문경새재가 누리던 영남과 기호를 잇는 으뜸 고개의 자리는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추풍령으로 넘어온다. 지금은 간이역으로 ‘전락’했지만 당시 추풍령역은 대단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출발한 기차가 기관차를 교체하는 곳이 추풍령역이었다고 한다. 역은 조용한 추풍령 마을을 식당이 즐비하고 커다란 ‘여인숙’도 두개나 있는 번화가로 바꾸었다. “일본인들이 김천은 몰라도 추풍령은 알던 그 시절” 충청북도에서 제일 먼저 측후소와 우체국이 세워진 곳도 추풍령이었다.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잘살아보세’ 노랫소리가 들리도록 계속되던 추풍령의 호황은 70년 들어 끝난다. “검문소 경찰이 지나는 트럭들에게 10원씩 받아 부자가 됐다”는 이야기를 ‘흘러간 세월 뒤돌아 보는’ 전설로 만든 것은 서울-부산간 고속도로였다. 70년 7월7일 개통된 고속도로는 추풍령면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가져가버렸다. 먼지 폴폴 날리던 길을 가느라 지쳐 추풍령에서 으레 먹고 자고는 다시 길을 떠나던 자동차들은 반나절이면 서울로 부산으로 내달렸다. 식당이며 여인숙의 역할도 추풍령휴게소가 대신했다. 손 의원은 그 변화를 “허락도 없이 가져가버렸다”며 아직도 불편한 심사를 내보였다. “지금 휴게소는 경북 김천시 봉산면 광천리가 주소예요. 추풍령은 충청도 고개인데 말도 안 되지요. 봉산면이면 몰라.” 그래서 손 의원은 지난해에 ‘추풍령 이름 되찾아오기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이름사용료라도 받아야 하는데…”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손 의원의 말은 휴게소의 ‘엄청난 지방세 수입’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지난해 휴게소가 한국도로공사에 납부한 영업비(임대료)를 나눠보면 하루에 605만원이라고 한다. 그런 알짜배기 휴게소가 다른 지방으로 넘어갔으니 손 의원이 분통을 터뜨리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도계는 서울-부산간 고속도로의 한가운데가 되는 214km 지점에서 갈린다. 접경에서 충청북도쪽으로 세우려 했던 ‘충북 휴게소’를 ‘경북 휴게소’로 바꾸게 된 것은 “국회의원 한명 내지 못한 영동군의 빈약한 빽” 때문이라는 것이다. 추풍면 사람들 사이에서는 “국회의장에 공화당 당의장 서리까지 지낸 김천 국회의원 백남억씨가 휴게소 위치를 옮겨버렸다”는 게 정설처럼 돼있다.
고속도로와 휴게소는 ‘흘러간 그 세월을 뒤돌아보는’ 일이지만 곧 시작될 4번 국도 우회도로 공사는 추풍령 마을의 ‘주름진 얼굴에’ 그림자까지 드리우게 한다. “하, 글쎄, 4번 국도를 돌린대잖아요. 반대를 많이 했는데 그게 안 됐어요.” 상권이 무너진다는 마을의 걱정에도 4번 국도 화장은 마을을 빙돌아 김천을 잇는 것으로 결정됐다고 한다. 그 국도가 완성되면 그나마 가뭄에 콩나듯 오가던 외지 차량들의 왕래까지 끊길 것이라고 이곳 사람들은 걱정한다. 그렇게 되면 추풍령 마을은 비둘기호나 잠시 머무는 기차역과 일제 때 시작한 철로용 자갈을 채취하는 석산만이 남게 된다.
높이가 300여m가 겨우 넘는 석산은 반쪽자리 산이었다. 금산이라고 부르는 그 산은 절대로 동강나서는 안 되는 산이었다. 금산은 백두의 정기를 지리산으로 잇는 백두대간의 봉우리였다. 이런 금산에 처음 삽을 댄 것은 일제 때였다. 마을 사람들은 지난 80년대 후반 추풍중학교 운동장에서 발견된 일제가 박은 쇠못과 금산 석산개발이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교통이 불편한 이곳에 석산을 개발할 이유가 없지 않겠냐는 생각에서다. 석산개발은 해방과 함께 중단된다. 그러나 불행은 계속됐다. 1962년 철도용 자갈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금산은 다시 깎이기 시작했고 그 결과가 지금의 반쪽짜리 산인 것이다.
추풍령 마을이 흘러간 옛 이야기라면 추풍령휴게소와 서울-부산간 고속도로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현재진행형이다. 늦은 밤 허기를 국수로 달래던 한 손님은 이 휴게소의 서비스를 “이전에는 45점, 지금은 85점”이라고 평가했다. 실제 이곳의 서비스는 일부 손님들이 “닭살 돋는다”고 말할 정도로 깍듯하다.
올해 초 전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에는 ‘확 달라지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섬기는 경영’을 하겠다는 도로공사의 경영방침이 휴게소에까지 미친 것이다. 건물이 개·보수되고 휴게소 직원들의 뻣뻣한 허리가 유연해지기 시작했다. 2년 혹은 1년 단위로 임대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휴게소쪽은 도공의 ‘공산품 20% 인하’ 요구도 거절할 수 없었다. 50∼60km이던 휴게소간의 거리가 그 절반으로 줄기 시작하면서 불붙은 휴게소간의 경쟁도 변화에 속도를 붙였다. 추풍령휴게소도 그 변화의 물결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변화지만 추풍령휴게소는 다른 휴게소와는 조금 달랐다. 전국 고속도로 휴게소 가운데 최초로 1971년 문을 었었다는 자부심 때문이다.
“고객감동 현장지도라는 이름으로 전문업체에 의뢰해 1년에 3회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고객모니터 제도도 운영하고요. 화장실에 유아용 세면대를 설치한 것도 경주에 사는 고객 이윤미님의 모니터를 반영한 것입니다.” 김성규 이사가 설명하는 이런 변화는 직원들의 사고방식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친절하게 손님들을 맞이하다보니 보람도 생기고 오히려 덜 피곤해요.” 휴게소 근무경력 3년 반을 맞는다는 김지혜(24)씨에게 친절은 스트레스까지 풀어주는 묘약이다.
휴게소에서 손님을 직접 대하는 일은 대부분 20대 초·중반의 미혼여성들이 담당한다. 아침 7시30분이면 야간근무자와 교대하는 탓에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한다. 1년 내 휴게소 불은 꺼져서는 안 된다. 그래서 휴일은 한 달 전에 서로의 스케줄을 맞춰 조정해야 하고 애인이 있어도 휴게소로 찾아오기 전에는 데이트를 마음대로 즐기지도 못한다.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돈을 던지는 행위와 반말을 듣는 것. 심지어 쌍말을 내뱉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그럴 때면 당장 그만두고 싶어져요. 결국은 참지만요. 그러다 기숙사에 돌아오면 수다로 풀어요.” 큰 언니격인 백현진(26)씨는 “반말이나 욕설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자신이 지불하는 돈으로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휴게소 직원들은 12시간 동안 서서 일한다. 그것도 쉴새없이 무거운 물건을 나르면서…. 그러면서도 항상 입가에 미소를 짓는 일은 분명 고역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따금 손님들이 던지는 격려가 큰 힘이 된다고 한다. 그 격려가 보람의 불길을 지펴 더 많은 친절을 낳게 하는 것은 물론이다.
휴게소 손님이 ‘이용객’에서 ‘손님’으로 올라가는 데 30여년이 걸렸다. 고속도로의 안전을 위해 24시간 담당구역을 순찰하는 도로공사의 고객지원단도 30여년에 걸쳐 지금의 모습까지 왔다. ‘보안원’에서 ‘안전순찰원’으로 그리고 ‘고객지원단’으로 바뀌어온 그들의 이름은 권위주의를 버리고 ‘섬기는 경영’을 실천하겠다는 의지였다. 노란 무쏘를 타고 하루 24시간 고속도로를 순찰하는 그들은 고객의 생명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위험을 감수한다. “제일 무서운 것이 잡물을 치우는 것이지요.” 별다른 안전장치 없이 총알처럼 달려가는 차량들 틈새를 누비며 도로에 떨어진 쇳조각, 각목, 화물차 덮개를 치우다 사고를 당한 동료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한 두개쯤 가슴에 담고 사는 게 그들이다.
서울-부산간 고속도로는 60년대의 가난에서 벗어나 번영의 70년대로 달려가겠다는 다짐이었다. 77명의 목숨과 맞바꾼 428km의 아스팔트도로는 수많은 부작용을 덮어버릴 만큼 긍정적 효과도 컸다. 경부고속도로 준공기념비에는 후대가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을 “나약과 빈곤을 불사르고 고난과 시련을 이겼다고” 기억해 주기 바라는 마음을 담은 ‘고속도로의 노래’라는 노산 이은상의 시가 적혀 있다.
99년 현재 고속도로 길이는 총 2001.2km. 2004년쯤 되면 3700km의 고속도로가 전국 어디서나 30분 내에 고속도로에 진입할 수 있는 시대를 열 것이다. 우리는 그 시대에 후손들을 위해 어떤 노래를 남길 것인가.
이 면장은 더이상의 금산 훼손을 막고 그 상처에 암벽훈련장을 만들어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고 싶다 한다. 휴게소 여직원은 더 배우고 싶고 더 친절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한다. 도공 고객지원단은 안전을 위한 것이니 고속도로에 들어서기 전에 차량정비만은 꼭 해달라고 당부한다. 이들이 더이상 이런 바람을 품지 않는 날 우리는 “함께 나누기 위해/ 산간벽지까지 길을 이었으니/ 이 길에서 닫힌 마음을 여는 법을 배우고/ 공존하는 삶을 배우라”라는 노래를 남길 수 있지 않겠는가.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36-추풍령-추풍령의좌절과-도전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내력을 알고 싶어 찾아간 면사무소는 마치 동네 사랑방 같았다. “김천 직지사에 머물던 사명대사가 고개를 지나는데 바람이 마치 가을바람처럼 선선하게 불었다나봐요. 그래서 ‘가을바람’ 추풍령이라고 불렀다고 하는 말이 전해집니다.” 정병선(66·추풍령면 개발자문위원회) 위원장이 들려준 이름의 내력이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 2만명을 막아내다 금산으로 우회한 적의 기습으로 전사한 장지현 의병장에 관한 이야기를 거들던 손영달(51) 영동군 의원이 화제를 바꾼다. “이곳이 전국에서 고속도로, 철도, 국도가 가장 가깝게 있는 곳이오. 아주 요충이지.” 추풍령면의 명물이라는 캠벨포도를 내온 추풍면 이한욱 면장까지 자리에 함께 하면서 탁상 위에는 구한말 역사가 펼쳐진다.
조선시대 문경새재가 누리던 영남과 기호를 잇는 으뜸 고개의 자리는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추풍령으로 넘어온다. 지금은 간이역으로 ‘전락’했지만 당시 추풍령역은 대단했다고 한다. 부산에서 출발한 기차가 기관차를 교체하는 곳이 추풍령역이었다고 한다. 역은 조용한 추풍령 마을을 식당이 즐비하고 커다란 ‘여인숙’도 두개나 있는 번화가로 바꾸었다. “일본인들이 김천은 몰라도 추풍령은 알던 그 시절” 충청북도에서 제일 먼저 측후소와 우체국이 세워진 곳도 추풍령이었다.
해방이 되고 한국전쟁이 끝나고도 ‘잘살아보세’ 노랫소리가 들리도록 계속되던 추풍령의 호황은 70년 들어 끝난다. “검문소 경찰이 지나는 트럭들에게 10원씩 받아 부자가 됐다”는 이야기를 ‘흘러간 세월 뒤돌아 보는’ 전설로 만든 것은 서울-부산간 고속도로였다. 70년 7월7일 개통된 고속도로는 추풍령면의 모든 것을 한꺼번에 가져가버렸다. 먼지 폴폴 날리던 길을 가느라 지쳐 추풍령에서 으레 먹고 자고는 다시 길을 떠나던 자동차들은 반나절이면 서울로 부산으로 내달렸다. 식당이며 여인숙의 역할도 추풍령휴게소가 대신했다. 손 의원은 그 변화를 “허락도 없이 가져가버렸다”며 아직도 불편한 심사를 내보였다. “지금 휴게소는 경북 김천시 봉산면 광천리가 주소예요. 추풍령은 충청도 고개인데 말도 안 되지요. 봉산면이면 몰라.” 그래서 손 의원은 지난해에 ‘추풍령 이름 되찾아오기 추진위원회’를 결성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었다. “이름사용료라도 받아야 하는데…”하는 아쉬움을 토로하는 손 의원의 말은 휴게소의 ‘엄청난 지방세 수입’을 염두에 둔 말이었다. 지난해 휴게소가 한국도로공사에 납부한 영업비(임대료)를 나눠보면 하루에 605만원이라고 한다. 그런 알짜배기 휴게소가 다른 지방으로 넘어갔으니 손 의원이 분통을 터뜨리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충청북도와 경상북도의 도계는 서울-부산간 고속도로의 한가운데가 되는 214km 지점에서 갈린다. 접경에서 충청북도쪽으로 세우려 했던 ‘충북 휴게소’를 ‘경북 휴게소’로 바꾸게 된 것은 “국회의원 한명 내지 못한 영동군의 빈약한 빽” 때문이라는 것이다. 추풍면 사람들 사이에서는 “국회의장에 공화당 당의장 서리까지 지낸 김천 국회의원 백남억씨가 휴게소 위치를 옮겨버렸다”는 게 정설처럼 돼있다.
고속도로와 휴게소는 ‘흘러간 그 세월을 뒤돌아보는’ 일이지만 곧 시작될 4번 국도 우회도로 공사는 추풍령 마을의 ‘주름진 얼굴에’ 그림자까지 드리우게 한다. “하, 글쎄, 4번 국도를 돌린대잖아요. 반대를 많이 했는데 그게 안 됐어요.” 상권이 무너진다는 마을의 걱정에도 4번 국도 화장은 마을을 빙돌아 김천을 잇는 것으로 결정됐다고 한다. 그 국도가 완성되면 그나마 가뭄에 콩나듯 오가던 외지 차량들의 왕래까지 끊길 것이라고 이곳 사람들은 걱정한다. 그렇게 되면 추풍령 마을은 비둘기호나 잠시 머무는 기차역과 일제 때 시작한 철로용 자갈을 채취하는 석산만이 남게 된다.
높이가 300여m가 겨우 넘는 석산은 반쪽자리 산이었다. 금산이라고 부르는 그 산은 절대로 동강나서는 안 되는 산이었다. 금산은 백두의 정기를 지리산으로 잇는 백두대간의 봉우리였다. 이런 금산에 처음 삽을 댄 것은 일제 때였다. 마을 사람들은 지난 80년대 후반 추풍중학교 운동장에서 발견된 일제가 박은 쇠못과 금산 석산개발이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서야 교통이 불편한 이곳에 석산을 개발할 이유가 없지 않겠냐는 생각에서다. 석산개발은 해방과 함께 중단된다. 그러나 불행은 계속됐다. 1962년 철도용 자갈을 구한다는 명목으로 금산은 다시 깎이기 시작했고 그 결과가 지금의 반쪽짜리 산인 것이다.
추풍령 마을이 흘러간 옛 이야기라면 추풍령휴게소와 서울-부산간 고속도로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드는 현재진행형이다. 늦은 밤 허기를 국수로 달래던 한 손님은 이 휴게소의 서비스를 “이전에는 45점, 지금은 85점”이라고 평가했다. 실제 이곳의 서비스는 일부 손님들이 “닭살 돋는다”고 말할 정도로 깍듯하다.
올해 초 전국의 고속도로 휴게소에는 ‘확 달라지겠습니다’라는 현수막이 내걸렸다. ‘섬기는 경영’을 하겠다는 도로공사의 경영방침이 휴게소에까지 미친 것이다. 건물이 개·보수되고 휴게소 직원들의 뻣뻣한 허리가 유연해지기 시작했다. 2년 혹은 1년 단위로 임대계약을 갱신해야 하는 휴게소쪽은 도공의 ‘공산품 20% 인하’ 요구도 거절할 수 없었다. 50∼60km이던 휴게소간의 거리가 그 절반으로 줄기 시작하면서 불붙은 휴게소간의 경쟁도 변화에 속도를 붙였다. 추풍령휴게소도 그 변화의 물결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변화지만 추풍령휴게소는 다른 휴게소와는 조금 달랐다. 전국 고속도로 휴게소 가운데 최초로 1971년 문을 었었다는 자부심 때문이다.
“고객감동 현장지도라는 이름으로 전문업체에 의뢰해 1년에 3회 교육을 하고 있습니다. 고객모니터 제도도 운영하고요. 화장실에 유아용 세면대를 설치한 것도 경주에 사는 고객 이윤미님의 모니터를 반영한 것입니다.” 김성규 이사가 설명하는 이런 변화는 직원들의 사고방식까지 변화시키고 있다. “친절하게 손님들을 맞이하다보니 보람도 생기고 오히려 덜 피곤해요.” 휴게소 근무경력 3년 반을 맞는다는 김지혜(24)씨에게 친절은 스트레스까지 풀어주는 묘약이다.
휴게소에서 손님을 직접 대하는 일은 대부분 20대 초·중반의 미혼여성들이 담당한다. 아침 7시30분이면 야간근무자와 교대하는 탓에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한다. 1년 내 휴게소 불은 꺼져서는 안 된다. 그래서 휴일은 한 달 전에 서로의 스케줄을 맞춰 조정해야 하고 애인이 있어도 휴게소로 찾아오기 전에는 데이트를 마음대로 즐기지도 못한다.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것은 돈을 던지는 행위와 반말을 듣는 것. 심지어 쌍말을 내뱉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그럴 때면 당장 그만두고 싶어져요. 결국은 참지만요. 그러다 기숙사에 돌아오면 수다로 풀어요.” 큰 언니격인 백현진(26)씨는 “반말이나 욕설은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고 자신이 지불하는 돈으로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한다.
휴게소 직원들은 12시간 동안 서서 일한다. 그것도 쉴새없이 무거운 물건을 나르면서…. 그러면서도 항상 입가에 미소를 짓는 일은 분명 고역일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따금 손님들이 던지는 격려가 큰 힘이 된다고 한다. 그 격려가 보람의 불길을 지펴 더 많은 친절을 낳게 하는 것은 물론이다.
휴게소 손님이 ‘이용객’에서 ‘손님’으로 올라가는 데 30여년이 걸렸다. 고속도로의 안전을 위해 24시간 담당구역을 순찰하는 도로공사의 고객지원단도 30여년에 걸쳐 지금의 모습까지 왔다. ‘보안원’에서 ‘안전순찰원’으로 그리고 ‘고객지원단’으로 바뀌어온 그들의 이름은 권위주의를 버리고 ‘섬기는 경영’을 실천하겠다는 의지였다. 노란 무쏘를 타고 하루 24시간 고속도로를 순찰하는 그들은 고객의 생명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자신의 위험을 감수한다. “제일 무서운 것이 잡물을 치우는 것이지요.” 별다른 안전장치 없이 총알처럼 달려가는 차량들 틈새를 누비며 도로에 떨어진 쇳조각, 각목, 화물차 덮개를 치우다 사고를 당한 동료들의 안타까운 이야기를 한 두개쯤 가슴에 담고 사는 게 그들이다.
서울-부산간 고속도로는 60년대의 가난에서 벗어나 번영의 70년대로 달려가겠다는 다짐이었다. 77명의 목숨과 맞바꾼 428km의 아스팔트도로는 수많은 부작용을 덮어버릴 만큼 긍정적 효과도 컸다. 경부고속도로 준공기념비에는 후대가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을 “나약과 빈곤을 불사르고 고난과 시련을 이겼다고” 기억해 주기 바라는 마음을 담은 ‘고속도로의 노래’라는 노산 이은상의 시가 적혀 있다.
99년 현재 고속도로 길이는 총 2001.2km. 2004년쯤 되면 3700km의 고속도로가 전국 어디서나 30분 내에 고속도로에 진입할 수 있는 시대를 열 것이다. 우리는 그 시대에 후손들을 위해 어떤 노래를 남길 것인가.
이 면장은 더이상의 금산 훼손을 막고 그 상처에 암벽훈련장을 만들어 후세에 교훈으로 남기고 싶다 한다. 휴게소 여직원은 더 배우고 싶고 더 친절하고 싶으니 도와달라고 한다. 도공 고객지원단은 안전을 위한 것이니 고속도로에 들어서기 전에 차량정비만은 꼭 해달라고 당부한다. 이들이 더이상 이런 바람을 품지 않는 날 우리는 “함께 나누기 위해/ 산간벽지까지 길을 이었으니/ 이 길에서 닫힌 마음을 여는 법을 배우고/ 공존하는 삶을 배우라”라는 노래를 남길 수 있지 않겠는가.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36-추풍령-추풍령의좌절과-도전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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